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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교육학개론 한국교육의 역사적 전개

by 머니베이커 2023. 8. 6.

1) 한국의 전통적 교육

한국의 교육사는 전통 교육에서 19세기말 급격한 서양교육으로 변화하면서 급격한 단절을 경험했다는 특징을 잘 살펴봐야 한다.

 

(1) 유교적 교육의 이념과 제도적 기초


   학교교육의 역사는 삼국시대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자와 유교의 도입은 제도교육의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 
   춘추시대 사상가인 공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유교는 형성되었다. '인(仁)'을 기본적 가치로 '예(禮)'를 행하는 인간을 '군자'라 하였고 이는 개인적 수양뿐 아니라 치자로서 남을 다스리는 일, 즉 수기치인을 기본 이념으로 하였다. 유교에서 제도교육이 발달하게 된 배경은 치자의 학문인 동시에 봉건적 통치체제를 정당화하는 정치이념과도 관련이 깊다. 학문으로서 유교는 개인의 인격 수양을 지향하는 동시에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고 선발하는 것에 중요성을 부여했다.  따라서 과거제도를 실시했고 국가 교육기관인 관학을 두고 교육을 실시했다. 이것은 국왕권 혹은 군권 강화와 관련된다. 또한 유학은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지적 체득을 추구하는 학문이었다. 교육 공간은 크게 학습이 이루어지는 강학 공간과 선현의 제사를 모시는 제향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동양적 스승관을 잘 보여준다. 동양에서의 가르침은 [중용]에 나오는 성(性), 도(道), 교(敎)의 세 글자에 잘 표현되어 있다. 교는 하늘이 부여한(性) 이치인 도(道)를 따르는 것으로 스스로 수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학공부에서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공부에서 시작하여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공부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하학상달(下學上達)'의 학습원리가 중요하다.  반드시 앞의 것을 충분히 익히고 복습한 후 새로운 내용으로 나아가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원리도 강조되었다. 




(2) 인재의 양성과 선발: 관학, 사학, 선발제도



①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교육제도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다. 고구려는 삼국사기에 최초의 관학이자 고등교육기관인 태학이 중앙에 설립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지방에 경당이 있었다고 구당서 신당서에 적혀있다. 백제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오경박사가 일본에 학문을 전한 기록이 있어 유학이 상당히 발달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신라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혼합되어 이루어진 화랑도의 교육으로 알 수 있다. 
통일신라는 신문왕 2년에 국학체제를 정비하였다. 국학의 교육목적은 유학교육이며, 15-30세의 귀족자제들이 입학하였으며 수업은 9년이었다. 논어, 효경을 필수로 수준에 따라 예기, 주역, 춘추, 상서, 문선을 세 과로 나누어 부과하였고 졸업 후는 신라 17 관등 중 10번째와 11번째 해당하는 대나마, 나마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국학 졸업생을 대상으로 독서삼품과를 두어 관리 선발에 활용하였다. 

② 고려

   고려시대에는 관학, 사학, 과거제도 등 유교적 인재 양성 및 선발의 체제가 갖추어졌다. 
관학은 국가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으로 유교적 교육의 상징인 문묘를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 최치원, 설총 등은 문묘에 배향하였다. 중앙에는 국자감 및 학당,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다. 성종 11년 왕명에 의해 창건된 국자감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의 6학으로 구성되었다. 이 6학은 아버지의 관직에 따른 입학규정이 있었다. [효경]과 [논어]를 비롯한 유학교과를 가르치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은 입학자격 제한이 있었고 잡학인 율서산학은 8품 이하의 아들이나 서인에게도 개방되었다. 24대 원종은 동서학당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중앙에 위치한 향교와 비슷한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 공양왕 2년 정몽주가 국자감(당시 명칭은 성균관)에 재직하면서 동서학당에 3개(남, 북, 중)의 증설을 주장하였으나 북부학당은 설치되지 못하고 4부 학당에 그쳤다. 
  지방의 관학으로는 향교가 있었다. 성종6년에는 12목에 경학박사와 의학박사 1명을 보내 지방의 관리와 백성을 가르치게 한 권학관제도가 있었고, 인종 5년에는 지방에 학교를 세우라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향교의 교관은 처음에는 국가에서 박사를 파견했으나 지방관청에서 초빙하거나 지방의 수령이 직접 교육하기도 하였다. 

   사학으로는 12도가 있었다. 최충이 문헌공도라는 사학을 설립하자 유학자들이 유사한 학교들을 세워 유명한 11개를 더하여 12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과거시험 준비기관의 성격을 띠었고, 과거 시험관과 합격자 간의 인적관계인 좌주문생제의 온상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려말에는 쇠퇴하였다.
   지방의 사학으로는 서당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인재 선발제도는 과거제도와 음서제도가 있었다. 과거제도는 중국 후주의 한림학사 쌍기의 건의로 처음 실시되었고 국자감의 설립보다 일찍 이루어졌다. 일종의 과거시행법인 과거절목을 제정함으로써 과거제가 완비되었다. 과거에는 제술업, 명경업, 잡업의 세 종류가 있었고, 제술업이 우대되어 성행하였고 합격한 자를 진사라고 하였다. 제술업에 합격한 자는 성적에 따라 갑, 을, 병의 등급을 두었다.  무과가 설치되기도 하였으나 실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과거는 3년에 한 번 치러졌으며 초시-국자감시-동당감시의 3단계로 실시되었고 국자감에서 3년 재학시 국자감시가 면제되는 혜택이 있었다. 고려말에는 시험관이 한 명인 단수지공거제에서 복수지공거제로 전환하였고, 왕이 직접 시험관이 되는 전시를 포함한 과거삼층법을 도입하였다. 

③ 조선

   조선시대 학제의 기본 틀은 고려시대의 것을 계승하였으나 그것을 보다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관학으로는 성균관, 4학, 향교 등이 있었으며, 왕실 교육기관과 잡학(기술) 교육기관들도 있었다. 대표적 국립 교육기관인 성균관은 문묘와 명륜당, 학생 기숙사인 동서양재 등을 기본으로 하여 강학활동과 각종 의례(석전제, 입학례, 대사례, 양로례 등)가 행해지던 공간이었다.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생원, 진사를 원칙으로 하였고, 정원은 200명이었다.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원점절목, 권학사목, 학교사목 등의 여러 규칙을 두어 교육 과정과 평가 등을 실시하였고, 유생들에게는 재회를 중심으로 한 자치활동이 허용되어 유소, 권당, 공제, 공관 등의 집단활동이 이루어졌다. 성균관에서 아침저녁으로 식당에서 도기에 표기를 하면 원점 1점을 부여하였는데, 300점을 획득해야 문과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한편, 사부학당은 성균관의 부속학교와 같은 성격을 지닌 학교로, 자체 문묘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향교와 비슷한 수준의 교육기관 역할을 하였다.
   향교는 1읍 1교 원칙에 따라 문묘, 명륜당 등을 둔 지방의 대표적 교육기관이었다. 16세 이상의 양반 및 향리 자제에게 입학자격이 주어졌고 행정단위에 따라 부,  대도호부, 목 90여 명, 도호부 70여 명, 군 50명, 현 30명 등으로 정해져 있었다. 향교의 재학생에게는 면역의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에 교생 지위 유지를 위한 절차를 엄격히 실시하였다.
   사학기관으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었다.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 최초의 서원이며 이황은 국가에서 재정 지원을 요청하여 소수서원을 세웠다. 편액과 많은 서적, 노비, 토지를 하사 받은 것이 사액서원의 시작이었다. 또한 선현의 학식을 기리기 위한 사당을 두는 향사기능도 있었다. 서원은 학력의 규제를 덜 받으며 학문활동과 수양을 하였으며, 사림들이 터전이 되었으나 사액서원의 증가로 인한 국가재정 손실 등으로 인해 고종 때 47개소를 제외하고 폐쇄하였다. 서당은 주로 사족 위주로 설립되고 운영되었으나 18세기 이후 평민층에 널리 분포하였다.
   과거제도는 문과, 무과, 잡과의 세 종류로 나뉘었고, 3년에 한 번씩 식년에 실시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문과와 무과는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로 이루어져 있고, 잡과는 전시가 없었다.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구분되어 소과를 구성한 생원과와 진사과가 각각 초시, 복시로 이루어져 있고 대과는 다시 초시, 복시, 전시로 나누어 치러졌다. 대과 응시자격으로는 생원 혹은 진사가 된 후 성균관 원점 300점을 받도록 요구하였다. 생원, 진사 및 잡과 합격자에게는 백패가 수여되었고, 문과와 무과 합격자에게는 홍패가 주어졌다. 

(3) 조선 후기 유교적 교육의 변용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각종 교육제도들은 사화, 당쟁, 양란 등의 변화 등과 연결되어 변질된 양상을 보였다. 정쟁의 결과로 새로운 학문의 개혁을 요구하는 실학자들이 등장했다. 특히 인재양성이나 선발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품행과 학식을 장기간의 체계적 양성과정을 통해 관찰한 후 천거하는 공거제도를 제안하였다. 개인의 현덕성에 기초하여 사와 민이 구별돼야 한다는 점에서 유교적 능력주의의 회복을 주장했다. 
   정약용은 천자문의 글자 구성 등이 문자학습원리에 맞지 않음을 비판하면서 [아학편]이라는 문자서를 제작하였다. 총 2,000글자로 된 [아학편]은 유형자 다음에 무형자를 배치하고 인간관계를 포함한 실물적이고 구체적인 글자부터 익히게 함으로써 보다 체계적인 방법으로 한자어를 익히게 한 교재다. 

 

 

2) 한국의 근대교육

 


(1) 개항기 신교육의 도입

   전통적 교육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을 거치면서 '근대화' 교육으로 변화하였다. '제향공간'은 단순한 제사 공간의 의미뿐 아니라 선현의 모범을 닮겠다는 인격교육적, 도덕교육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식 교육공간과 교과체계의 도입으로 그 의미가 퇴색했고 도덕, 윤리교육은 교과 수준으로 축소되어 실질적 교육목표가 지식획득과 공인된 학력 획득으로 변모했다. 
   1883년에 설립된 원산학사는 관민이 연합하여 설립한 학교로서 근대적 학문을 가르쳤다. 갑오개혁 이후 소학교, 중학교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학제가 선포되고, 모든 국민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교원 양성을 위하여 한성사범학교가 설치되어 근대적 초등교원 양성을 전문적으로 하였다. 900년 넘게 존속되었던 과거제도가 철폐되었고 유교 경전 위주의 학습 대신 교과중심의 교육과정으로 전환되어 실용교육, 대중교육, 여성교육의 필요성이 역설되었다. 
   자강운동 시기에 나타난 교육에 대한 높은 열의와 민족주의적 동기들은 식민지화 과정에서 저항적 민족주의의 중요한 기초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여성에 대한 제도교육이 시작되었다. 1886년 이화학당에서의 교육을 필두로 선교사 및 민간에 의한 여학교 설립이 꾸준히 이루어졌고 여성의 공적 사회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2) 식민지 시기 제도교육의 전개

   1910-1945년의 식민지 시기의 교육은 4차에 걸쳐 개정된 [조선교육령]인 법령에 의하여 규제되었다. 
[제1차 조선교육령]에 학제는 보통학교(4년), 고등보통학교(4년, 여자고등보통학교 3년), 전문학교 등으로 구분되었으며, 한성사범학교는 폐지되었다. 재조선 일본인에게 적용되었던 학제(소학교 6년, 중학교 5년)와 차별화되었고, 조선인에게는 고등보통학교가 사실상 최종 교육기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제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교육연한이 일본과 동일해졌다. 1924년 경성제대 예과, 1926년 법문학부, 의학부 등의 설립으로 고등보통학교에서는 대학입학을 위한 준비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제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학교 명칭이 일본과 동일한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 등으로 변화되었고 1941년에는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개명되면서 본격적인 황국신민화 및 내선일체의 동화교육이 실시되었다. 조선어가 폐지되고, 사립중등학교의 설립이 금지되었으며 일본역사, 수신 등의 이념교과가 강조되었다. 
[제4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전시교육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져 중학교의 수업연한이 4년으로 단축되고 전문학교도 3-6개월 단축되었다. 신사참배, 학도대조직, 황국신민서사 낭독 등 학교의 교육적 기능이 변질되고 군사체제화되었다. 
   한편 교육적 변화를 중심으로 볼 때, 입학난이라고 부를 정도로 취학률 및 입학경쟁이 강화되는 양상은 근대적 학제와 학력주의가 정착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3) 해방과 교육체제의 재구축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후 한반도는 연합군의 군정 지배를 받게 되었다. 미군정기에는 학무국과 조선교육심의회 등을 중심으로 일본식 교육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교육이념의 재천명(홍익인간), 학제개편(단선제, 6-3-3-4), 초등학교 한자 폐지(중등 한문과 설치), 남녀공학제, 종합대학체제 도입 등이 전개되었다. 새로운 교육원리로 새교육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원리 등을 교육과정 등에 적용하고 교원연수를 하는 등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의 추진이 정치적 불안정에 기인해 평탄하지는 않았다. 좌우의 이념적 대립은 첨예했고 이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을 두고 표면화되었다. 그 결과 남한의 교육계는 교수의 파면, 학생들의 퇴학 등으로 인적 손실이 컸으며 후유증이 상당하였다. 
  하지만 의무교육 실시, 산업화 등을 통해 취학률 등의 면에서 단기적 양적 확대를 이루어 나갔다. 7차례에 걸친 교육 과정의 개혁이 있었지만 이는 정권교체 등 교육 외적인 요인에 의해 실질적인 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지 못했다. 현재의 교육은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는 교육사 속에 나타나는 교훈들을 면밀히 검토해 나가면서 해결해 나가야겠다.